본문으로 바로가기

[MBTI 분석심리학] 내향형(I)의 의식적 태도, 무의식의 태도




■ 내향형(I)의 의식의 일반적 태도


  “세계는 결코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 보이는 것으로서 존재하기도 한다.”


  외향형의 사람들은 곧잘 모든 지각과 인식이 객관적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도 규정되는 것임을 잊어버린다고 융은 비평한다.


  똑같은 사물을 보아도 외향적인 사람은 객체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주로 보지만 내향적인 사람은 객체의 인상이 주체 안에서 형성한 것에 의거해서 사물을 본다. 내향적인 의식의 태도에도 물론 외적인 조건을 인식하는 능력이 있지만 언제나 그 판단과 행동에 결정적인 것은 주관적인 속성이다.


  이것을 두고 자기애적, 자기중심적, 주관주의적, 이기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순전히 외향적 태도에서 보는 편건이라고 하여 융은 그것을 주장한 오토 바이닝거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 주체란 무엇이냐고 융은 묻는다. “주체란 인간이다. 우리가 주체다” 라고 그는 말한다. “거의 병적일 정도로 사람들은 인식이 주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나는 인식한다’고 말하지 않는 세계와 인식이 없다는 것을 그렇게도 잘 잊는다. ‘내가 인식한다’는 말로써 그는 이미 모든 인식의 주관적 제약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기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객체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이와 똑같이 필수적으로 주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와 같은 외향적 시대에 내향적 태도는 외향적 태도와 동등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그것은 주관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등의 비난을 받기가 일쑤다. 1920년대에도 그랬는지 융은 ‘주관적’ 이라는 말은 외향적 시대풍조로 보아서 거의 비난처럼 들린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외향적 태도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무기로 ‘단지 주관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수가 있으나 그 말의 의미가 충분히 검토된 일은 없다고 지적하며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주관적 요소란 객체로부터의 영향과 함께 새로운 또 하나의 심리적 사실로 융합되게 하는 심리 작용 또는 심리적 반응이라고 나는 규정한다.”


  주관적 요소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해 왔고 어느 민족에도 있어 온 것이므로 그만큼 보편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바다의 넓이나 지구의 반경과 같이” 엄연히 존재하는 견지이다.


  “주관적 요소는 하나의 세계율이다. 이 위에 발을 딛고 선 사람은 객체에 근거를 둔 사람과 똑같은 지속성과 효용성과 확실성에 의거하고 있다.”


  심리학적 유형론에서 융은 외향형을 기술할 때와는 달리, 내향형에서는 그 특징보다도 내향적 태도가 외향적 태도와 똑같이 중요한 태도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당대의 학문적 경향이 오늘날보다도 더욱 ‘객관성’에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일깨우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융은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보다 우월시하거나 그것을 절대시하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주관적 태도가 객관적 태도나 마찬가지의 보편적인 태도임에는 틀림없으나 객관적 태도가 우연성에 의하여 변할 수 있는 것처럼 주관적 태도도 변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것이기보다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내향적 태도의 특징인 주관 중심 경향을 절대시하면 글자 그대로의 주관주의적, 자기중심주의에 빠지게 되어, 외향형으로부터 ‘그건 단지 주관적’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편협한 관점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상적인 경우의 내향적 태도는 원칙적으로 유전으로 주어진, 주체 안에 있는 정신 구조에 순응하는 태도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구조는 자아가 아니라 자아의 모든 발전 이전에 존재하던 것, 다시 말해서 원형의 세계이며, 자아를 훨씬 능가하는 자기이다. 건전한 내향형은 ‘자기’를 들여다보며 이에 입각해서 판단 또는 행동하려는 사람이며 자아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내향형은 자아를 자기와 혼동해서 뒤바꾸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아를 자기의 위치로 무제한 높인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 판단을 극대화하고 그것이 절대적임을 주장하게 된다. 이때 그는 그의 장점인 무의식에의 깊은 통찰을 못하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외향형에 내향적 경향이 있듯이 내향형에도 외향적 경향이 있어 적절하게 보상함으로써 내향적 태도를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그러나 내향적 태도가 극도에 다다라서 이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경향이 의식에서 배제되면, 무의식에는 의식의 경향과는 상반된 외향적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자아는 이와 같은 무의식의 외향적 관심의 제물이 되거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아의 팽창으로 인한 엄청난 권력욕에 사로잡히게 된다.


  내향형의 무의식의 경향은 다음에 다시 설명하거니와, 내향형과 외향형의 관계에 대한 묘사를 융의 말을 빌려 재현해 보기로 한다.


  “내향형에게 객체가 왜 항상 결정적인 것이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외향형에게는 어째서 주관적인 입장이 객관적 입장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는지 늘 의문이다. 외향형은 내향형이 저만 잘난 줄 아는 이기주의자가 아니면 독선적인 공상가라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 나아가 외향형은 내향형이 무의식적인 권력 콤플렉스의 영향 하에 있다고 가정하게 될 것이다. 이런 외향형의 편견에 내향형은 어쩔 수 없이 걸려들 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는 그의 단정적이고 강하게 일반화하는 표현 양식을 통하여 마치 그가 모든 다른 의견을 처음부터 배척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게다가 모든 객관적 소여를 선험적으로 지배하는 주관적 판단의 결연성, 경직성만으로도 강한 자기중심주의라는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하다.”


  외향과 내향 두 가지 유형의 관점에서 서로를 관조해 보는 것은 어느 유형의 편견으로도 물들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유형을 뛰어넘을 제 3의 시점에서 양쪽 이야기를 종합하는 수밖에 없는데, 관찰자의 유형에 따라서 그 기술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유형에 따르는 편견이나 선입관념을 극소로 줄이려면 각자가 자신의 무의식적 경향에 대하여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 내향형(I)의 무의식의 태도


  내향형이 자기에 입각해서 사물을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때 그는 이 세계와 인간의 마음의 심층을 깊이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란 엄청나게 큰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내향형이 자기의 전인격인 자기 자신에 입각하지 않고 단지 의식의 중심인 자아에 사로잡혀 있게 되면, 의식의 경향은 독선과 자기중심주의적인 오만에 사로잡히고 객체에 대한 관심과 고려를 무시하게 된다. 그 결과 모든 객체와의 관련성은 무의식에 억압된다. 의식의 태도가 자기중심적인 데 비해서 무의식의 태도는 반대로 객체 중심으로 바뀌어 가며 객관적 규준, 외부세계, 타인 등 모든 객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거기에 맞추려는 경향이 강해지는 등 의식과는 모순된 특징이 나타난다.


  개체가 ‘나’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그의 마음 깊숙이 ‘남’에 대한 두려움이 싹튼다. 마치 외향형이 자기 무의식의 자기중심적 이기적 경향을 보지 않으려고 더욱더 의식의 태도를 강화하여 객관세계에 헌신하고 밖으로 나가 지칠 때까지 활동하는 것처럼, 내향형은 자기 안에는 일어나는 객체 중시 경향을 보지 않기 위해서 더욱 강화된 독선적 경향과 자기 중심적인 태도로 무의식의 유혹을 물리치고 이를 누르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데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객체를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적응이 아니기 때문이다. 융의 말과 같이 내향적 태도가 극단에 다다르면 “정신의 자유는 수치스러운 재정적인 의존성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며, 행동의 자유분방성은 세평과 남의 의견 앞에 불안하게 얽애며 괴로워하게 되고, 도덕적인 우월성은 열등한 관계의 늪 속에 빠지게 되며, 지배에의 쾌감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처량한 동경으로 끝을 맺는다.”



  내향형은 자아의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객체와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위험한 객체’에 대항하여 자아를 방어하려고 한다. 그는 은둔자처럼 객관세계에서 도피하여 자기의 성 속에 숨어든다. 진정한 의미의 수도자적 은둔과 다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의식적인 객관세계와의 관계를 아주 끊어 버리거나 객체로부터의 자극을 통제할 수가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이 분방한 권력욕, 지배욕의 환상을 낳고 이 환상과 의식의 태도 사이의 갈등 속에서 점차 지치게 된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내향적 태도에 의하여 생기기 쉬운 전형적인 신경증은 정신쇠약증(다른 말로 신경쇠약증)이다. 이런 사람들의 무의식을 살펴보면 수없는 권력환상을 볼 수 있다. 자아를 둘러싼 강대한 적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도망치는 꿈들이 나타난다. 꿈속에서 때로는 이들과 대결하여 영웅적인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바깥세상과 모르는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것과의 접촉을 피하는 소심한 사람이다. 이 경우 이들이 객관세계, 즉 타인, 구체적인 현실, 정치세계, 법률, 경제, 행정, 단체 같은 것을 실지로 있는 것보다 지나치게 크게 평가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이들의 무의식 속에 형성된 강대한 외향적 경향을 외계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외향형은 그런 면에서 내향형처럼 외계를 과대평가하거나 그 현실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않는다.


  내향형의 무의식에 억압된 객체적인 요소는 유아적, 고태적인 특징을 띠며 따라서 원시적인 색채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요소가 외계에 투사되면 객체가 마치 마력을 지닌 존재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마치 원시인들에게 외계가 무수한 귀력을 띤 위험한 존재처럼 여겨지듯이, 내향형도 외계로부터의 위협이 거의 마술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향형은 때때로 무의식의 충동으로부터 자아를 방어하기보다는 스스로를 그 충동에 내맡김으로써 무의식의 외향적 경향에 지배되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외계는 그에게 위협일 뿐만 아니라 매혹적인 인력으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향적인 학자가 상아탑을 나와 사업을 시작하거나 정계에 투신한다. 그러나 그의 무의식의 외향적 경향은 미숙하고 유치한 상태에 있으므로 그의 탈바꿈은 대개 실패로 돌아가기 쉽다. 혹은 그가 하는 일이 실패까지는 안 되더라도 내향형은 그의 열등한 외향적 기능을 보상하기 위해서 외향형보다도 더 지나치게 객관적인 평가에 매달리고 객관적 규준을 따지고 객관적 가치에 순응하고 객관세계에 지나치게 영합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강박적인 인상을 풍기고 때로는 히스테리성 자기현시처럼 보일 수도 있다. 본래 내향적인 사람이 규칙이나 법률의 글자 하나를 가지고 따지고 대수롭지 않은 형식에 매달려서 자기 자신이나 남을 불필요하게 괴롭히는 수가 있다. 또한 스스로 국제 무대에 뛰어들거나 사교계를 누비며 혹은 사회사업에 열을 올린다. 이렇게 내향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보다 더욱 외향적이어서 겉으로 보아서는 그를 외향적인 사람으로 오인할 정도로 그의 열등기능의 대상이 완벽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내향형은 이런 외향적 태도를 오래 유지하는 데 피로감을 느끼고 심지어 허무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는 미구에 스스로 그의 외향적인 사회적 역할을 포기하거나 신체적, 정신적인 쇠약으로 그 역할을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의 장점인 주체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되찾을 때 마치 강으로 돌아간 물고기처럼 별안간 활기를 띠고 비로소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을 흔히 목격한다.

  



출처 : 분석심리학 pp.155-160